애니메이션 이야기, 카우보이 비밥

방금 플라스틱 컵에 미지근한 보리차를 따르다가 문득 옛날 생각이 났어. 내 방 한구석, 먼지가 하얗게 내려앉은 책장 귀퉁이에는 언젠가 친구한테 빌렸다가 결국 돌려주지 못한(아니, 안 돌려준 거지 뭐) 카우보이 비밥 DVD 케이스가 꽂혀 있거든. 사실 처음 이 애니메이션을 보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남들이 다 명작이래서 의무감 같은 걸로 클릭했었어. 1998년작이라니,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거나 겨우 응애 하고 울던 시절에 나온 작품이잖아? 화면 비율부터 요즘 넷플릭스 오리지널과는 전혀 다른 4:3 비율에, 자글자글한 필름 그레인까지 느껴지니까 솔직히 처음 몇 분 동안은 '아, 이거 옛날 감성 못 견디겠는데' 싶었지.


근데 이게 참 신기해. 첫 화를 꾸역꾸역 보고 나서 알 수 없는 홀린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더니, 결국 마지막 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는 내 방 침대에 엎드려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니까. 20대를 지나고 있는 지금, 누구나 한 번쯤 겪는 미래에 대한 막막함이나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 게 맞나' 하는 묘한 공허함을 이 우주를 떠돌아다니는 현상금 사냥꾼들이 아주 기가 막히게 위로해 주더라고. 오늘은 그냥 흔하디흔한 작품 해설 말고, 내가 비밥을 보며 느꼈던 날것 그대로의 감정과 이 애니메이션이 왜 세월이 흘러도 바래지 않는 클래식인지 아주 신나게 풀어볼게.


카우보이 비밥 <출처: 온라인 커뮤니티>


우주를 가로지르는 블루스의 멜로디, 장르의 경계를 부수다

카우보이 비밥을 한마디로 정의하라고 하면 난 절대 'SF 애니메이션'이라고만 말 안 해. 이건 그냥 재즈야, 혹은 블루스 그 자체지. 처음 이 작품을 볼 때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오프닝 곡인 'Tank!'였어. 칸노 요코가 만든 그 폭발적인 빅밴드 재즈 선율이 흘러나오는 순간, 뇌리에 박히는 전율이 장난 아니었거든. 애니메이션 음악이 이렇게까지 세련될 수 있나 싶어서 나도 모르게 멜론에 검색해서 플레이리스트에 담아두고 출근길 지하철에서 매일 들었을 정도야.


이 작품은 SF라는 탈을 쓰고 있지만, 사실 그 안을 들여다보면 서부극, 느와르, 하드보일드, 심지어 코미디와 호러까지 아주 그냥 장르의 뷔페야. 우주선 비밥 호를 타고 태양계를 누비는 스파이크 스피겔과 제트 블랙은 화려한 은하계를 구하는 영웅들이 아니야. 당장 내일 먹을 냉동 고추잡채 재료비가 없어서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현상금을 노리고 범죄자를 쫓아가다가 오히려 쫄딱 망해서 빚만 더 쌓이는 백수나 다름없지.


내가 대학 졸업하고 첫 취업에 실패해서 방안에 틀어박혀 삼양라면만 먹던 시절이 있었어. 그 꿉꿉하고 암울한 방 안에서 모니터 속 스파이크가 옥상에 가만히 앉아 담배 연기를 뿜어내던 그 뒷모습을 보는데, 묘하게 위로가 되더라고. 멋지게 세상을 구하는 슈퍼 히어로보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오늘 당장 먹을 피자 한 조각을 걱정하는 이 허름한 어른들의 모습이 훨씬 더 인간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아.


과거라는 무거운 짐을 메고 오늘을 걷는 사람들

비밥의 진짜 매력은 주인공들이 다들 엄청난 '과거'를 숨기고 있다는 거야. 스파이크는 조직의 에이스였지만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 돌아온 상처 투성이의 전직 범죄자고, 파트너인 제트는 과거 경찰 조직에 배신당해 팔 한쪽을 잃은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지. 여기에 기억을 잃은 채 거액의 빚더미에 앉아 등장하는 사기꾼 페이 발렌타인과, 천재 해커지만 어딘가 엉뚱한 에드, 그리고 인간의 언어를 알아듣는 초고지능 데이터 댕글러 아인까지. 이 엉망진창인 조합이 비밥 호라는 좁아터진 공간에 옹기종기 모여 살잖아.


현실에서도 우리 그렇잖아? 폰에 저장된 전 남친 사진처럼, 혹은 대학 시절 실패했던 팀플의 기억처럼, 지우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는 과거의 찌꺼기들을 하나쯤은 품고 살아가잖아. 페이가 옛날 비디오 테이프를 통해 기억을 되찾으려다 결국 자신이 돌아갈 곳이 없다는 걸 깨닫고 오열할 때, 나도 모르게 내 앨범 속 옛날 사진들을 뒤적거리고 있더라고.


과거는 바꿀 수 없고 미래는 불확실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멈춰 설 수는 없다는 걸 이 캐릭터들은 말없이 보여줘. 스파이크가 늘 입버릇처럼 하던 "과거는 과거일 뿐이야"라는 말이 처음엔 그냥 쿨한 척하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20대 중반을 훌쩍 넘긴 지금 와서 보니까 그게 얼마나 처절하고 단단한 각오인지 조금은 알겠더라. 상처를 안고도 오늘을 그냥 묵묵히 걸어 나가는 것, 그게 바로 비밥이 우리에게 건네는 진짜 어른의 대화 방식이었어.


삐걱거리는 우주선처럼 완벽하지 않아서 더 사랑스러운 관계

요즘 나오는 애니메이션들이나 드라마들을 보면 주인공들끼리 아주 그냥 끈끈하고 오글거릴 정도로 우정을 과시하거나, 아니면 확실한 러브라인으로 시청자들을 설레게 하잖아? 근데 카우보이 비밥은 그런 뻔한 클리셰를 아주 시원하게 갖다 버려. 비밥 호의 승무원들은 서로를 가족이라고 부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엄청 다정하게 굴지도 않아. 맨날 맛없는 식사 메뉴를 두고 티격태격 싸우고, 서로 돈 빌려달라고 졸라대고, 위험할 땐 "알아서 살아남아라" 하고 각자 도생하기 바빠 보이지.


근데 정작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서로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건 또 얘네들이야. 페이가 위험에 빠졌을 때 스파이크가 툭 무심하게 총을 들고 나서는 모습이나, 제트가 스파이크의 다친 몸을 말없이 치료해 주는 장면들을 보면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그 깊은 유대감이 모니터 밖까지 뚝뚝 떨어져.


이걸 보면서 내 주변 사람들을 떠올렸어. 매일 연락을 주고받지 않아도, 가끔 만나면 서로 직장 상사 욕이나 하면서 떡볶이나 사 먹는 내 고등학교 친구들 말이야. 엄청 세련되고 완벽한 관계는 아니지만, 인생의 폭풍우가 몰아칠 때 나를 욕하면서도 곁에 있어 주는 그런 투박한 사람들. 비밥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쿨하면서도 끈끈한 거리감이야말로 내가 이 작품을 인생 애니메이션으로 꼽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야.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의 빈틈을 메워주는 그 모습이 너무 따뜻해서 눈물이 핑 돌 때도 있었어.


잊을 수 없는 그 여운, 세상에서 가장 쿨한 안녕

카우보이 비밥을 이야기하면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그 전설적인 결말이지. "You're gonna carry that weight." (당신은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야 할 거예요.) 마지막 화가 끝나고 화면에 이 문구가 덩그러니 남겨졌을 때, 전율과 함께 형언할 수 없는 먹먹함이 밀려왔어. 보통의 해피엔딩을 기대했던 나로서는 스파이크의 마지막 선택이 너무 아프고 충격적이어서 한동안 멍하니 지냈던 기억이 나.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결말만큼 스파이크 스피겔이라는 캐릭터에게 어울리는 엔딩은 없었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끝까지 자신의 과거와 정면으로 맞서 싸웠고, 후회 없이 불태웠잖아. 슬프지만 비참하지 않고, 쓸쓸하지만 당당한 그 퇴장이 아직도 내 마음 한구석에 깊은 여운으로 남아 있어.


친구가 나한테 "비밥 결말 왜 그 모양이야, 너무 허무해"라고 물어본 적이 있었어. 그때 난 이렇게 대답해 줬지. "인생이 원래 해피엔딩만 있는 건 아니잖아. 끝이 조금 아쉽고 여운이 남아야 진짜 명작이지." 비밥은 우리에게 완벽한 해피엔딩을 안겨주진 않지만, 삶이라는 거대한 우주를 항해하는 우리 모두에게 괜찮다고, 너만 그런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게 아니라고 다정하게 어깨를 툭 쳐주는 것 같은 위로를 선물해 줘.


세월이 흘러도 바래지 않는 영원한 나의 인생 애니메이션

지금까지 카우보이 비밥에 대해 내 주절주절한 감상들을 풀어놨는데,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이 애니메이션은 단순히 옛날에 만들어진 추억의 명작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어. 화려한 액션이나 세련된 비주얼을 넘어, 20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의 방황과 외로움, 그리고 그것을 품어주는 따뜻한 시선이 이 작품 전체에 켜켜이 스며들어 있거든.


혹시 아직도 이 명작을 안 본 사람이 있다면, 혹은 삶이 유난히 지치고 헛헛하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면 오늘 밤 당장 플레이 버튼을 눌러보라고 권하고 싶어. 비밥 호의 그 낡은 엔진 소리와 흘러나오는 재즈 선율을 듣고 나면, 마음 한구석에 묵직하지만 기분 좋은 온기가 채워지는 걸 느낄 수 있을 거야.


우리의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지만, 스파이크처럼 멋지게 한 곡조 뽑아내며 오늘 하루를 버텨낼 힘을 얻게 될 테니까. "See you space cowboy..." 이 한마디와 함께 내 마음속 영원한 클래식으로 남을 이 작품을 만나게 된 건 정말이지 내 인생의 작은 행운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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