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요즘 날씨도 묘하게 쌀쌀해지고 마음 한구석이 헛헛할 때 문득 영화 한 편이 생각나서 이렇게 찾아왔어. 너도 혹시 영화 '왕과 사는 남자' 봤어? 나는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고 나왔을 때 진짜 온몸에 힘이 쭉 빠지면서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했잖아. 특히 유해진 배우님이 연기한 엄흥도라는 인물이 가슴에 대못처럼 박혀서 며칠 동안은 일상생활이 안 될 정도로 여운이 깊게 남았어.
우리가 살아가면서 거대한 부조리나 세상의 차가운 벽 앞에서 '내가 과연 무슨 힘이 있다고' 하며 무력해질 때가 있잖아. 나도 작년에 회사에서 정말 친했던 동기가 부당한 일로 힘든 시간을 겪을 때, 나 혼자 살아남겠다고 제대로 편을 들어주지 못했던 기억이 있어. 그때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내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비겁하게 느껴졌는지 몰라. 이불을 뒤집어쓰고 엄청 울면서 '나는 왜 엄흥도처럼 당당하게 의를 지키지 못할까' 자책하기도 했거든. 그래서 이번에 영화 속 엄흥도의 발자취와 그가 품었던 마음을 깊이 뜯어보면서, 내 지난날의 상처도 같이 위로받고 싶어졌어. 우리 같이 조용히 이야기 나눠보자.
차가운 권력의 시대, 영월 산골에 불쑥 찾아온 비극의 무게
영화 속 배경이 되는 강원도 영월 청령포는 상상만 해도 너무 외롭고 고립된 공간이잖아.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어린 나이에 유배당한 단종 이홍위가 그곳에 발을 들였을 때, 산골 마을 광천골의 촌장 엄흥도의 삶도 완전히 뒤틀려버려. 처음엔 먹고살기 바빠서, 마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어떻게든 유배지를 유치하려고 애쓰던 평범한 소시민이었잖아? 우리도 그렇잖아. 당장 내 코가 석 자인데 대의명분이나 정의를 따질 여유가 어디 있겠어. 나도 가끔 내 코앞에 닥친 스펙 쌓기와 취업 스트레스에 치여서 타인의 고통이나 사회적 부조리는 눈감고 살 때가 많거든. 그런 면에서 엄흥도의 초기 모습은 영화 속 인물이라기보다 그냥 우리들의 모습 그 자체여서 더 마음이 갔어.
하지만 어린 왕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호랑이 사건을 겪으면서 엄흥도와 단종의 관계는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지. 처음에는 감시자와 죄인의 관계로 만났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엄흥도는 그 어린 청년의 눈빛 속에 담긴 짙은 외로움과 슬픔을 외면할 수가 없었던 거야. 나도 언젠가 엄청 힘들어서 혼자 울고 있을 때, 내색도 안 하던 동네 길고양이한테 밥을 챙겨주던 이웃 아저씨가 묵묵히 건네주던 따뜻한 두유 한 개에 펑펑 울었던 기억이 있어. 세상이 다 나를 등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누군가 나를 그냥 한 사람의 인간으로 바라봐주는 그 시선 하나가 사람을 살리잖아. 엄흥도에게 단종은 단순히 폐위된 왕이 아니라, 지켜주고 싶은 한 명의 여린 소년이었던 거지.
의(義)를 택한다는 것, 세상의 눈을 감고 내 마음의 목소리를 듣는 일
이 영화가 진짜 가슴을 후벼 파는 건 그다음부터야. 숙부인 금성대군의 복위 거사가 실패로 끝나고, 단종에게 사약이 내려지는 그 잔인한 순간 말이야. 한명회를 비롯한 권력자들은 눈에 불을 켜고 단종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멸문지화시키겠다고 벼르고 있었어. 만약 엄흥도가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면, 아니 세상의 이기적인 눈으로만 세상을 봤다면 단종을 모른 척하고 도망쳤어도 아무도 그를 손가락질하지 않았을 거야. 오히려 그것이 당시의 현실에서는 가장 현명하고 안전한 선택이었겠지.
하지만 엄흥도는 그러지 않았어. 적의 손에 비참하게 죽기 싫다며 자신에게 차라리 목숨을 거둬달라고 부탁하는 어린 왕의 눈을 보며, 엄흥도는 눈물을 흘리며 활줄로 그의 목을 조여야만 하는 지옥 같은 선택을 마주하게 돼. 상상만 해도 미쳐버릴 것 같지 않아? 내가 살기 위해, 혹은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의 마지막 청을 들어주며 손에 피를 묻혀야 하는 그 심정이 어땠을까.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내 안의 비겁함을 들킨 것 같아 너무 괴로웠어. 나도 직장에서 조금만 불이익이 올 것 같으면 부당한 상황을 보고도 은근히 눈을 감거나, 나 혼자 살아남겠다고 입을 다물었던 순간들이 떠오르더라고. 당장 눈앞의 안전을 좇는 것과 내 영혼의 떳떳함을 지키는 것 사이에서 갈등할 때, 우리는 얼마나 자주 비겁함을 선택하며 살아갈까. 엄흥도가 흘린 눈물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겨우 지켜낸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과 의리에 대한 울부짖음이었던 거야.
역사가 지우려 했던 이름,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건네는 위로
조선왕조실록 같은 공식 기록에는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다는 아주 간략한 사실만 남아있다고 해. 세조가 통치하던 시절에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것은 가문의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대역죄였으니까, 그 이름조차 제대로 기록되기 힘들었을 거야. 오랫동안 야사와 후손들의 구전으로만 떠돌던 그의 이야기가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우리 앞에 영화로 소환된 거지.
영화 속 마지막 장면에 단종이 죽은 지 242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단종으로 복위되고, 엄흥도가 충성과 의로움을 지킨 인물로 길거리에서 찬양받는 게 아니라 영원히 그들의 무덤이 같은 곳에 나란히 남게 되었다는 자막이 올라올 때, 진짜 눈물이 터져 나왔어. 당장은 권력자의 칼날 아래 짓밟히고 바보 같은 선택으로 보일지라도, 진심으로 타인의 아픔을 품고 의를 향해 걸었던 그 묵묵한 발걸음은 결코 역사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거잖아.
너도 요즘 많이 지치고 힘들지? 내가 가는 이 길이 맞는지, 이렇게 아등바등 살아서 뭐하나 싶을 때가 많을 거야. 남들처럼 영악하게 살지 못해서 손해만 보는 것 같고, 나만 바보같이 진심을 다했다가 상처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말이야. 하지만 기억했으면 좋겠어. 세상이 기억해주지 않아도, 당장 눈앞에 아무런 보상이 없어도, 내 마음속 양심과 의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그 작은 태도들이 모여서 결국 우리 인생을 진짜 의미 있게 만들어준다는 걸 말이야.
영화 속 엄흥도가 거친 산골 바람 속에서 단종의 품에 온기를 채워주었듯, 오늘 하루 상처받고 지친 너의 마음도 내가 진심으로 꼭 안아주고 싶어. 너는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따뜻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야. 혹시 요즘 어떤 일 때문에 마음이 복잡하고 힘들었어? 괜찮다면 너의 이야기도 나한테 조용히 들려줄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