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건축학개론 현재 승민

영화 <건축학개론>을 보고 나면 마음 한구석이 찌릿하게 아려오면서 여운이 정말 길게 남곤 하죠. 저도 얼마 전에 서른셋이라는 나이에 문득 이 영화를 다시 꺼내 보게 되었어요. 한참 일에 치여 살다가 예전 첫사랑 기억도 스쳐 지나가고,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 게 맞나 싶던 참이었거든요.


오늘은 영화 속에서 건축가로 살아가는 승민의 모습과, 그가 마주한 현실적인 상처들을 따뜻하게 위로해 보는 시간과 함께, 서연이 왜 하필 이 시절에 승민을 찾아와 다시 재회하고 싶어 했는지 그 애틋한 속마음을 저의 사소한 이야기와 곁들여 깊이 있게 풀어보려고 해요.


건축학개론 건축가 승민 <출처: 온라인 커뮤니티>

첫사랑의 상처를 공간으로 빚어내는 건축가, 승민의 삶

영화 속에서 서른 살이 된 승민은 우리가 흔히 아는 화려하고 트렌디한 건축가라기보다는, 치열한 현실을 버텨내는 고단한 직장인의 모습에 훨씬 가까워요. 직장인으로 클라이언트를 상대하고, 쉴 새 없이 걸려 오는 전화에 진땀을 흘리며, 자존심을 굽혀야 하는 순간들도 수없이 마주하죠.


제가 작년에 회사를 옮기면서 거실 인테리어를 조금 바꾼 적이 있어요. 그때 디자이너 분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느꼈던 게, 공간이라는 건 단순히 사람이 머무는 곳이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과 과거, 그리고 살아온 흔적이 고스란히 담기는 도화지 같다는 거였어요.


승민에게 건축은 어쩌면 아주 오래전 덮어두었던 상처를 마주하는 일이자, 동시에 자기 자신을 증명해 내야 하는 치열한 생존의 방식이었을 거예요. 과거 대학 시절, 서연 앞에서 어설프고 가난했던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워하며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던 그 소년은, 이제 튼튼하고 반듯한 건물을 지어 올리는 프로가 되었죠.


하지만 승민이 지어 올린 멋진 사무실과 반듯한 수트 뒤에는, 여전히 스무 살 그 가난하고 상처받았던 청춘의 파편들이 아슬아슬하게 숨겨져 있었어요. 남들 보기엔 부족함 없는 30대 남자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 내면은 첫사랑의 실패와 현실의 벽에 부딪혀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던 거예요.


우리가 사회에서 아무리 어른인 척, 단단한 척 가면을 쓰고 살아가도 문득문득 찾아오는 외로움에 무너지는 것처럼, 승민에게 서연의 등장은 잘 쌓아 올린 모래성 같은 일상에 작은 균열을 내는 일이었을 겁니다. 그 차가운 현실 속에서 치열하게 버텨온 승민의 어깨를 진심으로 토닥여주고 싶어져요. "너는 그 시절에도, 지금도 충분히 최선을 다해 멋진 사람이야"라고 말이에요.


이혼한 서연, 그녀는 왜 하필 승민을 찾아와 재회하고 싶었을까

서연이 승민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을 때, 그녀는 이미 결혼을 했다가 실패하고 상처를 안은 채 고향으로 돌아온 상태였어요. 모든 것을 잃은 듯 지쳐 있던 그녀가 하필 왜 십 년도 더 지난 옛 첫사랑, 그것도 자신의 가장 초라했던 시절을 알고 있는 승민을 찾아간 걸까요?


제 친구 중에도 오랜 연애 끝에 결혼했다가 이혼의 아픔을 겪은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고 바닥을 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지금의 화려한 인맥이나 성공한 모습이 아니라, 내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어도 사랑받았고 가장 순수했던 시절의 기억이라고요.


서연에게 승민은 단순한 옛남자 그 이상의 의미였을 거예요. 지금 그녀가 마주한 현실은 너무나 차갑고 복잡했죠. 결혼 생활의 파탄, 사회적인 시선, 그리고 지칠 대로 지친 마음. 그런 서연에게 제주도의 옛집을 새로 짓는 일은, 자신의 망가진 인생을 다시 설계하고 치유하는 유일한 구원의 동아줄이었을 거예요.


그리고 그 집을 지어줄 사람으로 오직 승민만을 떠올린 건, 그녀의 깊은 속마음에 승민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 그리고 온전한 신뢰가 남아있었기 때문이에요. 스무 살 그 시절, 두 사람 사이에는 오해와 어긋남이 있었지만, 서로를 향했던 감정만큼은 거짓 없는 진심이었으니까요.


서연은 승민과 함께 집을 지어가면서, 그저 멋진 건물을 완성하고 싶었던 게 아니에요. 집을 허물고 새로 다지는 그 과정 속에서, 엉켜버린 자신의 인생도 다시 제자리를 찾고, 스무 살 그 눈부시게 예뻤던 시절의 순수했던 자신과 다시 만나고 싶었던 거죠. 승민이라는 안전지대 안에서, 비로소 마음 놓고 울고 위로받고 싶었던 게 바로 그녀의 진짜 속마음이었을 겁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미완의 건축학개론

돌이켜보면 우리 삶에도 다 저마다의 '건축학개론' 같은 순간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때 조금만 더 솔직했더라면, 그때 내 자존심을 조금만 더 내려놓았더라면 지금 우리의 결말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는 아쉬움 말이에요.


승민과 서연은 결국 다시 예전의 연인으로 돌아가는 해피엔딩을 맞이하진 않아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고, 승민에게는 곁을 지키는 약혼녀가 있으며, 서연 역시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향하죠. 하지만 그들이 함께 지어 올린 제주도의 집은 그 자체로 두 사람의 아팠던 청춘에 대한 가장 아름답고 성대한 위로였어요.


우리가 지나온 사랑과 아픔들도 이와 같지 않을까 싶어요. 비록 이루어지지 않았고 지금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살아가지만, 그 시절 우리가 함께 나눈 진심만큼은 인생이라는 커다란 도면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단단한 설계도처럼 남아 있는 거니까요.


오늘 밤은 여러분도 문득 잊고 지냈던 여러분만의 스무 살, 혹은 가장 반짝였던 시절의 기억을 꺼내어 가만히 안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서툴렀지만 진심이었던 그 시절의 나에게, 그리고 지금도 치열하게 하루를 버텨내고 있는 지금의 나에게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깊은 위로를 건네보세요.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가장 아름답게 지어진 집 한 채씩을 품고 살아가는 소중한 존재들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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